자원 재활용
순환경제 시대,
중소기업이 준비할
3가지
글. 이소라
자원 가격은 오르고 규제는 촘촘해지고 있다. 지금까지 기업에 환경은 ‘지켜야 할 기준’이었다면 이제는 ‘설계해야 할 조건’이 되고 있다. 순환경제가 산업의 새로운 표준으로 자리 잡는 배경과 그것이 기업 경영에 미치는 영향을 짚어본다.
자원 확보 경쟁에서 자원 활용 경쟁으로
한때 기업 경쟁력은 필요한 원료를 얼마나 싸고 안정적으로 조달하느냐에 달려 있었다. 그러나 지정학적 갈등과 공급망 재편, 핵심 광물 확보 경쟁이 심화되면서 자원은 더 이상 언제든 시장에서 구매할 수 있는 값싼 생산요소가 아니다. 원유와 광물, 희토류를 비롯한 핵심 원자재의 가격과 공급 불확실성이 커지고 있으며 특정 국가와 지역에 집중된 공급망은 기업 경영의 직접적인 리스크가 되고 있다.
여기에 탄소중립과 자원순환 정책이 결합하면서 경쟁의 기준도 달라지고 있다. EU를 중심으로 재생원료 사용, 재활용성, 내구성·수리 가능성, 제품 전과정의 환경정보에 대한 요구가 확대되면서 기업에는 제품을 ‘얼마나 많이 생산하는가’뿐 아니라 한정된 자원으로 얼마나 많은 가치를 만들어내고 그 가치를 얼마나 오래 유지하는가가 중요해지고 있다.
따라서 앞으로의 경쟁력은 새로운 자원을 계속 확보하는 능력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이미 경제 안에 들어온 자원을 회수하고 재사용·재제조·재활용해 다시 생산에 투입하는 능력이 공급망 안정성과 비용 경쟁력을 좌우하게 된다. 자원 확보의 경쟁에서 자원 활용의 경쟁으로 산업의 게임 규칙이 바뀌고 있다.
글로벌 산업의 새 기준이 된 순환경제
이 흐름을 가장 강력하게 제도화하고 있는 곳이 유럽연합(EU)이다. EU는 신순환경제 행동계획(CEAP)을 통해 제품 출시 단계부터 개입한다. 2024년 7월 발효된 에코디자인 규정(ESPR)은 가전제품을 비롯한 거의 모든 제품에 대해 내구성, 부품 교체 가능성, 재활용성을 설계 요건으로 요구한다. 이어 포장재 및 포장폐기물 규정(PPWR)을 통해 제품 패키징 단계부터 재활용성을 의무화하고 불필요한 포장을 제한하는 등 자원 감축 압박을 한층 더 높이고 있다. 여기에 지난 2026년 7월부터 EU 전역에 적용된 ‘수리권 지침’은 주요 가전 및 전자기기에 대해 소비자가 합리적인 비용으로 수리를 요청할 권리를 보장하며 보증 연장까지 유도하고 있다. 규제 집행 속도에 회원국별 온도 차는 있으나 법적 구속력을 지닌 거대한 제도적 방향성 자체는 이미 되돌릴 수 없는 흐름으로 정착됐다.
EU는 순환물질 사용률(CMUR, 전체 자원 사용량 중 재활용 원료가 차지하는 비율)을 2030년까지 22.4%로 끌어올리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그런데 유럽통계청이 2025년 11월 발표한 최신 수치는 12.2%(2024년 기준)로 목표치의 절반을 조금 넘는 수준에 머물러 있다.
한국도 같은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 2024년 시행된 순환경제사회 전환 촉진법은 정책의 중심을 폐기물 관리에서 경제 전반의 순환성 강화로 옮겼다. 제품의 순환이용성 평가, 순환원료(재생원료) 사용 촉진, 신기술·서비스에 대한 규제 특례(샌드박스) 등이 이 법에 담겨 있다. 이 법을 담당하는 정부 조직도 최근 개편됐다. 2025년 10월, 환경부는 산업통상자원부의 에너지 정책 기능을 흡수해 ‘기후부(이하 기후부)’로 확대 개편되며 기후·에너지·환경 정책을 총괄하는 컨트롤타워가 됐다. 순환경제 정책 역시 이제는 기후부 소관이다. 아직 유럽에 비해 권고적 성격이 강하지만 방향은 명확하다. 순환성은 곧 정책이 요구하는 최소 기준이 돼 가고 있다.
국내 제조기업의 AX는 아직 초기 단계
국내 중소·중견 제조기업의 AX는 아직 초기 단계에 머물러 있다. 중소벤처기업부의 <스마트제조혁신 실태조사(2024)>에 따르면 공장을 보유한 중소·중견 제조기업 중 스마트공장 도입률은 19.5%, 중소기업은 18.6%에 그쳤고 도입 기업의 75.5%도 기초 단계에 머물러 있다. 특히 제조데이터를 수집하는 기업은 60.8%에 이르지만 제조 AI를 실제 도입한 기업은 전체의 0.1%에 불과했다. 이는 국내 제조 현장이 DX의 기반은 일부 축적하고 있으나 이를 AI 기반 의사결정과 운영 최적화로 연결하는 AX 단계에는 아직 본격적으로 진입하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제품의 전 생애주기가 경쟁력이 된다
순환경제로의 전환은 환경팀이나 CSR 부서만의 일이 아니다. 제품 설계, 원료 조달, 생산 공정, 판매 후 서비스까지 밸류체인 전 구간에 영향을 미친다. 제품 설계 단계에서는 ‘얼마나 싸게 만드나’보다 ‘자원을 덜 쓰며 얼마나 오래, 쉽게 고쳐 쓸 수 있나’가 새로운 설계 기준으로 되고 있다. 부품을 표준화하고 분해가 쉬운 구조로 바꾸는 것이 곧 규제 대응이자 원가 관리 전략이 된다. 원료 조달에서는 1차 원료 의존도를 낮추고 재생원료·2차 원료 사용 비율을 늘리는 로드맵이 필요해졌다. 원자재 가격 변동성에 덜 흔들리는 공급망을 만드는 일이기도 하다.
판매 이후의 관계도 달라진다. 과거에는 제품을 판매하고 나면 고객과의 접점이 끊어졌지만 일회성 거래를 넘어 제품의 수명 주기 전반을 아우르는 지속적인 연결로 확장된다.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제조업체가 소유권을 유지한 채 효용만 제공하는 ‘제품 서비스화(PaaS)’ 모델이다. 이는 단순한 장기 렌털을 넘어 사용 과정의 수리·유지보수부터 수명 종료 후 회수·재제조까지 아우른다. 나아가 리퍼브나 인증 중고 사업 역시 제조사가 ‘생애주기 책임 이행’을 투명하게 입증하고 자원을 회수하는 수단으로 자리 잡고 있다. 이처럼 순환경제의 사후 관리는 ‘한 번 팔고 끝’이던 방식을 넘어 제품의 탄생부터 회수·재판매까지 모든 이력을 관리하며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는 핵심 경영 전략으로 진화하고 있다.
정보 공시의 무게도 커지고 있다. EU의 ESPR은 제품의 수리 가능성, 재활용률 등 정보를 소비자와 시장이 확인할 수 있도록 디지털 제품 여권 도입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이는 제품의 탄생부터 폐기까지 전 생애주기 데이터를 투명하게 추적하고 입증해야 한다는 뜻이다. 순환성은 더 이상 모호한 홍보 문구가 아니라 개별 제품 단위의 이력을 투명하게 증명해야 하는 필수적인 규제 준수 요건이 되는 것이다.
순환경제에서 찾는 중소기업의 성장 기회
이러한 규제 강화는 당장은 장벽처럼 보이지만 선제적으로 대응한다면 오히려 강력한 기회가 될 수 있다. 순환경제 역량을 갖춘 중소기업은 두 가지 방향에서 독자적인 경쟁력을 구축할 수 있다. 첫째는 대기업들이 강력한 환경 규제(ESPR, PPWR)를 충족하기 위해 공급망을 재편하는 과정에서 세부 부품의 모듈화 설계나 디지털 제품 여권 대응 데이터를 제공하는 순환경제 전문 협력사로 우위를 확보할 수 있다. 둘째는 독자적인 순환 비즈니스 모델로 새로운 시장을 개척할 수 있다. 맞춤형 재제조, 전문 리퍼브 유통, 구독 서비스나 자원순환 플랫폼 등 틈새시장을 공략해 독자적인 브랜드와 고객층을 구축할 수도 있다.
이를 위해 중소기업이 지금 당장 실행할 수 있는 행동은 크게 세 가지다. 첫째, 자사 제품의 수리 용이성과 재활용성을 자체 점검해 설계를 보완하는 것이다. 둘째, 제품의 소재 정보나 부품 구성을 투명하게 추적·관리할 수 있는 데이터 대응 체계를 갖추는 것이다. 셋째, 재생원료·2차 원료 사용 비율을 단계적으로 늘리는 계획을 지금부터 세워 다가올 공급망 요구와 공시 압박에 대비하는 것이다.
순환경제는 결국 ‘어떻게 덜 버리는가’의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다르게 설계하는가’의 문제다. 이를 비용으로만 보는 기업과 새로운 기회로 삼는 기업의 격차는 앞으로 점점 벌어질 것이다. 순환경제는 이제 선택이 아닌 산업의 새로운 표준이다.
Profile. 이소라
- 한국환경연구원 순환경제연구실장
- 기후에너지환경부 중앙환경정책위원회 위원
- 국무총리실 국가기후위기대응위원회 실무작업반 위원
- 전 대통령 직속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 에너지환경 전문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