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첫
모듈형 자동화 장비에
‘8·15’ 이름 붙인 까닭은
㈜에이피텍 주재철 대표
글. 편집부
사진. 임학현
국내 첨단 제조 현장에서 핵심 장비 대부분을 해외 기술에 의존하던 시절, “우리 손으로도 충분히 만들 수 있다”는 믿음으로 창업에 나선 기술자가 있었다. 2005년 설립된 ㈜에이피텍은 스마트폰 카메라 모듈과 반도체 공정용 초정밀 자동화 장비를 국산화하며 성장해왔다. 최근에는 차세대 반도체 패키징 장비 개발에 집중하며 글로벌 자동화 장비 기업으로의 도약을 준비하고 있다.
현장 기술자에서 창업가로,
기술 독립의 꿈을 품다
주재철 대표의 출발점은 산업 현장이었다. 직업계고 전자과를 졸업한 주재철 대표는 반도체 패키징 기업에 입사해 현장 엔지니어로 첫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생산 현장에서 장비를 직접 다루며 기술을 익혔고 이후 세일즈 업무까지 경험하면서 기술과 시장을 함께 바라보는 시야를 넓혀갔다.
현장은 그에게 또 다른 배움의 공간이었다. 장비는 끊임없이 진화했고 산업 환경 역시 빠르게 변화했다. 그는 기술자로 오래 살아남기 위해서는 공부를 멈춰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바쁜 회사 경영 속에서도 꾸준히 공부를 이어갔고 새로운 기술과 시장 변화를 읽는 데 많은 시간을 투자했다.
2000년대 초반, 주재철 대표는 LED와 태양광 산업을 미래 성장산업으로 주목했다. 특히 LED 산업의 성장 가능성을 높게 평가했다. 하지만 산업 현장을 지켜보며 아쉬움도 컸다. 당시 국내 제조 현장에서 사용되는 핵심 장비 대부분은 일본 등 해외 기업 제품에 의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국내 기업들이 세계적인 제조 경쟁력을 갖추고 있음에도 정작 핵심 생산장비가 해외 기술에 의존하는 현실은 그에게 큰 고민거리였다.
결국 주재철 대표는 2005년 창업에 나섰다. ㈜에이피텍(AP Tech)이라는 사명에는 그의 철학이 그대로 담겨 있다. ‘AP Tech’는 ‘Any Possible Technology’의 약자로 기술의 한계를 스스로 규정하지 않고 새로운 가능성에 끊임없이 도전하겠다는 의미다.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든다’는 신념 역시 이때부터 ㈜에이피텍의 기업 문화로 자리 잡았다.
외산 장비 의존을 넘어
세계 수준의 기술력으로 승부하다
창업 초기 ㈜에이피텍은 LCD와 LED 장비 개발에 집중했다. 이후 스마트폰 시장이 빠르게 성장하면서 카메라 모듈 조립 설비 분야에 진출했고 최근에는 첨단 반도체 패키징 장비까지 사업 영역을 확대하고 있다. 산업 변화에 따라 새로운 시장을 선제적으로 준비해온 결과다.
그러나 신생 장비 기업이 시장에서 살아남는 일은 쉽지 않았다. 장비 산업은 무엇보다 신뢰가 중요한 분야다. 아무리 우수한 기술을 보유하고 있어도 실제 생산 현장에서 성능이 검증되지 않으면 고객은 쉽게 기회를 주지 않는다. 특히 당시 카메라 모듈 장비 시장은 일본 기업들이 사실상 주도하고 있었다. 신생 기업인 ㈜에이피텍에는 레퍼런스도, 인지도도 부족했다.
주재철 대표는 정면 돌파를 선택했다. 고객사의 생산 라인에 직접 들어가 기술력을 인정받자는 전략이었다. 작은 프로젝트부터 시작해 하나씩 성과를 쌓아나갔다. 생산 현장에서 문제를 해결하고 고객이 원하는 수준 이상의 품질을 구현하며 신뢰를 얻어갔다. 그는 ‘고객이 필요로 하는 기술을 먼저 준비하고 약속한 품질과 납기를 반드시 지키는 것’이야말로 장기적인 파트너십의 출발점이라고 강조한다.
특히 카메라 모듈의 핵심 부품인 하우징을 초정밀로 부착하는 장비 개발에 성공한 것은 중요한 전환점이 됐다. 이 기술을 기반으로 글로벌 스마트폰 제조사들로부터 기술력을 인정받기 시작했고, ㈜에이피텍은 본격적인 성장 궤도에 올라설 수 있었다. 이후 ㈜에이피텍은 디스펜서, 테스터, 테이핑 장비 등 다양한 분야에서 국산화에 성공하며 국내 장비 산업의 경쟁력 강화에 기여해왔다.
주재철 대표가 가장 큰 자부심을 느끼는 순간 역시 기술 혁신의 성과와 연결돼 있다. ㈜에이피텍은 2018년부터 개발한 모듈형 자동화 장비를 세계 최초로 상용화했다. 글로벌 스마트폰 제조사로부터 최고 수준의 평가를 받으며 ㈜에이피텍 기술력이 세계적인 수준임을 인정받은 순간이었다.
특히 이 장비에는 ‘8.15’라는 이름이 붙었다. 광복절이 상징하는 독립처럼 외산 장비 의존에서 벗어나 기술 독립을 이뤄냈다는 의미를 담았다. 또 다른 장비 이름인 ‘6.25’에는 치열한 글로벌 경쟁을 산업 전쟁에 비유한 의미를, ‘10.3’에는 새로운 시장을 열겠다는 포부를 담았다. 장비 이름 하나에도 기술 자립과 도전에 대한 철학이 녹아 있는 셈이다.
㈜에이피텍 경쟁력의 핵심은 선행 기술 확보에 있다. ㈜에이피텍은 매년 매출의 5~10%를 연구개발에 투자하며 고객보다 먼저 필요한 기술을 준비해왔다. “회사는 미래 먹거리를 준비하는 곳입니다.” 주재철 대표는 말한다. 연구개발을 멈추는 순간 기업의 미래도 멈춘다는 생각 때문이다. 그는 1·2차 산업이 생산 효율에 초점을 맞춘다면 첨단 장비 기업의 경쟁력은 결국 연구개발에서 나온다고 강조한다.
또한 ㈜에이피텍은 장비 개발부터 생산, 설치, 유지보수까지 전 과정을 데이터 기반으로 관리하며 품질과 신뢰도를 높이고 있다. 축적된 데이터와 현장 경험은 새로운 장비 개발의 밑거름이 되고 있으며 이는 ㈜에이피텍이 글로벌 고객사와 오랜 파트너십을 이어갈 수 있는 배경이 되고 있다.
AI와 데이터로 준비하는
차세대 제조 혁신
최근 제조업은 AI와 데이터 기술을 중심으로 빠르게 재편되고 있다. 반도체 산업 역시 AI 확산과 고성능 반도체 수요 증가로 제조 공정의 정밀도가 더욱 높아지고 있다. 특히 첨단 반도체 패키징 기술은 차세대 산업 경쟁력을 좌우할 핵심 분야로 주목받고 있다.
㈜에이피텍은 이러한 변화를 일찍부터 준비했다. 약 3년 전부터 차세대 반도체 패키징 장비 개발을 추진해왔으며 올해 세계 최초 수준의 신기술 장비 개발 완료를 목표로 하고 있다. 주재철 대표는 이를 기반으로 2027년부터 본격적인 시장 확대가 가능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그는 앞으로의 스마트팩토리가 자동화를 넘어 AI가 데이터를 학습하고 공정을 스스로 최적화하는 지능형 제조 시스템으로 발전할 것으로 전망한다. 제조 현장에서 발생하는 방대한 데이터를 얼마나 효과적으로 분석하고 활용하느냐가 미래 경쟁력을 좌우하게 될 것이라는 설명이다.
글로벌 공급망 재편 역시 국내 장비 기업에는 새로운 기회가 될 수 있다. 세계 각국이 공급망 안정성과 기술 자립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고객사의 국산화 요구도 확대되고 있기 때문이다. 주재철 대표는 이러한 변화가 기술 경쟁력을 갖춘 국내 장비 기업들에 새로운 성장 기회가 될 것으로 보고 있다.
㈜에이피텍은 앞으로도 카메라 모듈과 반도체 패키징 분야를 중심으로 초정밀 자동화 기술 개발을 이어갈 계획이다. 동시에 AI와 데이터 기반의 제조 혁신 역량을 강화하며 글로벌 시장 공략에도 속도를 낼 방침이다. 2030년 차세대 반도체 패키징 분야를 대표하는 글로벌 자동화 장비 기업으로 도약하겠다는 목표도 세웠다.
주재철 대표는 “기술 혁신을 통해 창출한 가치는 고객과 임직원이 함께 나눠야 한다”며 “세계 최고 수준의 기술로 대한민국 산업 경쟁력 향상에 기여하는 기업이 되고 싶다”고 말했다. 현장 기술자의 작은 꿈에서 시작된 ㈜에이피텍의 도전은 오늘도 새로운 가능성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