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만 치료제와 함께
뜨는 시장, 지는 시장
글. 전다현
GLP-1은 더 이상 비만 치료제가 아니다. 식욕을 줄이는 데 그치지 않고 소비자의 선택 기준과 지출의 방향까지 바꾸며 식품, 패션, 웰니스 등 산업 전반에 새로운 경쟁 질서를 만들고 있다.
‘양’에서 ‘밀도’로,
한 번의 섭취가 더 중요해지는 시장
GLP-1은 식품기업의 경쟁 단위를 바꾸고 있다. 더 큰 용량과 더 잦은 섭취를 놓고 경쟁하던 시장이 한 번의 섭취 안에 얼마나 높은 영양과 효용을 담을 수 있는지를 겨루는 시장으로 이동하고 있다. 세계 최대 식품기업 네슬레가 출시한 ‘바이탈 퍼수트(Vital Pursuit)’는 GLP-1 복용자와 체중관리 소비자를 겨냥해 제품당 최소 20g의 단백질을 담고 식이섬유와 필수 영양소를 강화했다. 콘아그라는 고단백·고섬유질 기준을 충족하는 ‘헬시 초이스’ 제품에 ‘GLP-1 친화’ 마크를 도입했고, 다논은 고농축 단백질과 프리바이오틱 식이섬유를 결합한 ‘오이코스 퓨전’ 음료를 출시했다.
모건스탠리에 따르면 GLP-1 사용자의 하루 열량 섭취량은 평균 20~30% 감소했고 복용자의 74%는 하루 간식 섭취를 두 차례 이하로 줄였다. 미국 약 15만 가구의 구매 데이터를 분석한 연구에서도 GLP-1 복용 가구의 식료품 지출은 6개월 이내 평균 5.3% 감소했으며 스낵과 제과류 등 가공식품의 감소 폭이 특히 컸다.
그러나 핵심은 섭취량 자체의 감소보다 소비가 줄어드는 양상에 있다. 습관적·충동적 구매는 빠르게 줄어드는 반면 영양과 목적이 분명한 제품으로 수요가 집중되고 있다. 먹는 횟수가 줄어들수록 한 번의 선택이 갖는 비중은 커지고, 소비자는 그 한 번에서 더 높은 영양과 포만감, 편의성, 만족을 동시에 요구한다.
GLP-1 투여군을 타깃으로 출시된 제품들
‘식욕’에서 ‘자기 투자’로,
체중 감량이 만드는 연쇄 소비
두 번째 변화는 소비 자원의 이동이다. 소비의 초점은 ‘무엇을 먹을 것인가’에서 ‘어떤 모습으로 살아갈 것인가’로 이동하고 있다. 가장 먼저 반응하는 시장은 패션이다. 시장조사기관 서카나(Circana)에 따르면 GLP-1 복용자 4명 중 1명은 단순히 작아진 몸에 옷을 맞추기 위해서가 아니라 ‘완전히 달라진 자신의 외모를 새롭게 연출하기 위해’ 옷을 구매했다고 답했다.
이러한 변화는 달라진 몸을 유지하고 더 적극적으로 관리하려는 행동으로 이어진다. 삼일PwC경영연구원 조사에서 복용자의 36%는 유산소운동을 늘렸고, 21%는 근력운동을 확대했으며, 15%는 웨어러블 기기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기 시작했다.
중요한 것은 체중 감량이 소비의 끝이 아니라 새로운 소비의 출발점이 된다는 점이다. 변화한 몸을 유지하기 위해 운동을 시작하고, 새로운 모습을 표현하기 위해 옷을 사며, 달라진 활동 범위에 맞춰 건강관리와 여가 방식도 바꾼다. 신체의 변화가 생활 전반의 변화를 연이어 불러오는, 신체에서 시작된 연쇄적 디드로 효과다.
‘충동’에서 ‘필요’로,
욕망보다 이유가 중요한 시대
GLP-1이 바꾸는 것은 식욕의 크기만이 아니다. 소비를 촉발해온 충동의 작동 방식 자체다. 최근 의학계에서는 GLP-1 제제가 뇌의 보상 회로에 관여해 음주와 흡연뿐 아니라 강박적 쇼핑이나 도박과 같은 충동 행동까지 완화할 가능성에 주목하고 있다. 인과관계와 적용 범위는 더 검증돼야 하지만 ‘원한다’는 감정이 곧바로 ‘먹는다’와 ‘산다’로 이어지던 기존의 소비 공식이 흔들릴 수 있다는 점은 중요한 신호다.
지난 수십 년간 소비산업은 욕망을 충족하는 것만큼이나 욕망을 만들어내는 데 능숙해졌다. 한정판, 푸시 알림, 원클릭 결제, 추천 알고리즘, 즉시 할인은 모두 소비자가 숙고할 시간을 줄이고 충동과 구매 사이의 거리를 좁히는 장치였다. 기업의 경쟁력 역시 제품의 필요성과 효용뿐 아니라 소비자의 충동을 얼마나 빠르게 자극하느냐에 따라 좌우되곤 했다.
그러나 충동의 강도와 빈도가 낮아지면 소비의 기준도 달라진다. 소비자는 ‘왜 필요한가’, ‘다른 것으로 대체할 수 없는가’, ‘이 가격을 지불할 만큼 가치가 있는가’를 먼저 묻게 된다.
GLP-1은 이러한 변화의 시작일 수 있다. 앞으로 인간의 충동과 감정, 보상 심리에 개입하는 기술이 발전할수록 즉각적인 욕망에 기대온 소비 방식은 점차 힘을 잃을 가능성이 크다. 충동이 강한 시장에서는 화려한 이미지와 반복적인 노출만으로도 선택을 끌어낼 수 있었다. 그러나 자신의 욕망을 더 엄격하게 걸러내는 소비자에게는 자극보다 이유가 중요해진다. 이제 장기적인 효용과 자신의 기준을 충족하는지에 더 큰 영향을 받을 것이다. 결국 앞으로의 소비는 자극이 사라진 뒤에도 선택할 만한 이유를 남기는 방향으로 이동할 것이다.
Profile. 전다현
- 트렌드코리아 소비트렌드분석센터 연구위원
- < 트렌드코리아 > 시리즈 공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