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하는 브랜드 뒤엔
‘팬슈머’로 진화한
팬덤 있다
콘텐츠 산업에서 이제 성패를 가르는 건 관객 수나 시청자 수 같은 지표가 아니다. 대신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된 건 팬덤의 유무다. 팬덤에서 시작해 팬덤으로 끝나는 새로운 패러다임은 콘텐츠 산업만이 아니라 모든 산업 분야에도 적용되고 있다.
글. 정덕현
Profile. 정덕현
- 대중문화 평론가
- <대중문화 트렌드 2018> 등
한때 시장의 승패는 숫자가 결정했다. 누가 더 많이 팔고, 누가 더 많은 고객을 모았는가가 브랜드의 힘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얼마나 ‘열광’을 만들어내는가, 그것이 성패를 가른다. 팬들은 더 이상 소비자에 머물지 않는다. 함께 만들고, 이야기하고, 브랜드를 성장시키는 주체, 바로 ‘팬슈머(Fan+Consumer)’로 진화했다. 이제 기업은 고객의 주목을 사는 대신 관계를 설계해야 하는 시대에 들어섰다. 상품이 아닌 세계관으로, 광고가 아닌 공감으로 팬을 만든 브랜드만이 살아남는다. 모든 산업의 중심에는 이제 팬덤이 있다.
케이팝에서 산업으로,
팬덤의 확장
전 세계를 강타한 소니픽처스 애니메이션 <케이팝 데몬 헌터스>는 놀랍게도 다양한 한국 문화에 대한 전 세계적인 관심을 증폭시켰다. 라면, 김밥, 국밥 같은 K푸드는 물론이고 목욕탕이나 한의원 같은 한국 일상 문화 체험에 대한 외국인들의 욕구를 만들었다. 또 작품에 등장한 낙산공원 성곽길은 팬이라면 반드시 찾아야 할 성지가 됐다. 흥미로운 건 작품 속 등장한 호랑이와 까치 캐릭터로 인해 국립중앙박물관이 때아닌 특수를 경험하게 됐다는 점이다. 이 캐릭터의 모티브가 된 전통 민화 작호도가 들어간 굿즈를 구매하기 위한 인파로 오픈런 사태가 벌어졌다. 극 중 보이그룹 사자보이스가 쓴 ‘갓’도 화제가 돼 ‘까치 호랑이 배지’와 더불어 ‘갓 키링’도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이 현상은 새삼 뮤지엄 굿즈 자체에 대한 관심을 높였다. 이미 쓰이던 ‘뮷즈’라는 표현도 다시 회자되며 다양한 아이디어 상품이 주목받는 계기가 됐다. 갓을 모티브로 만든 ‘조선의 멋 갓잔’, 술을 따르면 선비의 얼굴이 붉게 변하는 ‘취객 선비 3인방 변색 잔 세트’, 미니어처 크기로 만들어진 ‘자개소반 무선충전기’ 등등. 박물관에서 그저 관람의 대상이던 문화유산들이 일상 속 뮷즈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도대체 이런 일은 왜 벌어진 걸까.
그 밑바탕을 들여다보면 ‘팬덤’이라는 하나의 키워드가 보인다. 사실 <케이팝 데몬 헌터스>의 글로벌 신드롬 역시 바로 이 팬덤을 겨냥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이미 전 세계에 저변이 생긴 K팝 팬덤이 그들이다. <케이팝 데몬 헌터스>는 사실상 열정적인 K팝 팬덤의 마음을 저격하는 내용으로 무장한 작품이기도 하다. 그간 서브컬처이자 비주류로 치부돼 왔지만 서서히 세계 팬들을 모으며 메인컬처로 성장하는 과정을 함께한 팬덤들이라면 팬과 K팝 아티스트가 하나가 돼(혼문) 악령(나쁜 생각들)을 물리치는 서사에 열광할 수밖에 없었을 게다. 그것이 K팝 팬들이 음악을 통해 위로받았던 그 경험들을 그대로 담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팬덤들이 결집해 만든 <케이팝 데몬 헌터스>의 성공은 콘텐츠의 차원을 넘어 현실까지 영향을 미치는 파급효과로 이어졌다. 팬덤이 가진 강력한 힘이다.
팬덤이 바꾼 소비의 공식
팬덤 소비가 가진 힘은 수치로도 확인할 수 있다. 국립박물관 문화재단에 의하면 뮷즈 연간 매출액은 2020년 38억 원에서 2022년에 117억 원, 2023년에는 149억 원으로 증가했다. 여기에는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이 있다. 2020년 뮷즈에 대한 관심을 촉발한 인물이 바로 BTS의 리더 RM이다. 그가 당시 국립중앙박물관의 반가사유상 전시와 더불어 제작된 미니어처를 구매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뮷즈가 MZ세대들에게 ‘힙한’ 아이템으로 떠올랐기 때문이다. 이후에도 이 반가사유상 미니어처는 나영석 PD가 만든 <서진이네-멕시코 편>에 테이블 오브제로 등장해 세계인들의 관심을 받았다. 스타와 연결된 팬덤들의 관심은 그대로 소비로 연결돼 몇 년 사이에 3배가 훌쩍 넘는 매출액 증가로 이어진 것이다. K팝의 인기와 더불어 관련 굿즈 시장들과 팝업스토어들이 생겨난 것도 팬덤 소비의 영향이다. 여의도 더 현대 백화점의 경우 K팝 아이돌의 팝업스토어가 상설로 열리면서 해외 팬들의 성지로 떠올랐다.
그런데 팬덤 소비는 K팝 산업에만 국한된 건 아니다. 스타와 팬덤이 존재하는 스포츠 분야에서도 팬덤 소비는 일반화됐다. 좋아하는 스포츠 스타의 굿즈를 구매하고 응원하는 팀 중심의 스포츠 해설을 들으며, 나아가 현장 경기 직관을 하는 일련의 소비문화들이 정착돼 있다. 또한 최근에는 취향을 공유하는 콘텐츠 팬덤도 생겨나고 있다. 코로나 이후 침체기에 빠져 있는 극장 소비에 있어 단비처럼 등장한 재패니메이션 팬덤이 대표적이다. 이 불황기에도 <진격의 거인>이나 <귀멸의 칼날>이 흥행에 성공하고, 나아가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모노노케 히메> 같은 작품이 재상영돼 인기를 끌고 있는 건 결국 팬덤의 힘이 작용한 덕분이다.
새로운 소비자로서의 팬덤,
팬슈머
K팝을 대표하는 ‘21세기 비틀즈’ BTS는 늘 상을 받는 자리에서 자신들의 팬덤 ‘아미’에 대한 경의를 표현한다. 이것은 그저 예의의 차원이 아니라 진심이다. BTS의 성장사에 아미의 지분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BTS의 성공은 디지털 네트워크로 가능해진 글로벌 시장에서의 SNS 팬덤 전략과 맞물려 있는 면이 있다. 시작부터 끊임없이 SNS를 통해 팬들과 소통하고 그 성장을 함께해온 아미들은 이제 BTS가 어떤 음원을 내놓아도 구매하고 스스로 주변에 입소문을 내는 막강한 팬덤 소비자가 됐다. 물론 이것은 과거부터 같은 노래를 다른 패키지로 여러 개 만들어 내놓아도 팔리는 이른바 ‘의리 소비’의 형태로 기획사 아이돌 그룹들이 이미 추구해왔던 것이긴 하다. 하지만 BTS가 보여주는 팬덤 소비는 성장 자체를 함께한 ‘프로듀싱’ 개념까지 담겨 있다는 점에서 특별하다. 여기서 등장하는 게 바로 ‘팬슈머(Fan+Consumer)’다. 그저 수동적 소비의 차원에 머물러 있는 게 아니라 능동적으로 원하는 걸 주장하고 그 주장이 수용된 것을 소비하는 새로운 소비자가 그들이다.
팬슈머가 탄생한 가장 큰 요인은 뉴미디어가 소비자들에게 심어준 ‘세상의 중심은 나’라는 관점의 변화다. 주로 밀레니얼세대들이 갖게 된 이 관점은 모바일처럼 개인화된 미디어가 만들어낸 것이다. 과거의 주력 미디어였던 TV 같은 경우 송신자(생산자)가 주가 되고 이를 소비하는 수신자(소비자)는 종이 되는 관계를 만들었다. 그래서 우리는 TV가 전하는 정보를 별 의심 없이 수용하곤 했다.
하지만 모바일은 수신자가 주가 돼 선별적으로 송신자의 정보를 취득한다. 모바일처럼 개인화된 미디어를 통해 세상을 보는 새로운 세대들은 그래서 소비에 있어서도 자신을 중심으로 세워두고 필요하면 생산에 관여한다. 이로써 매스미디어 시대에 묵살되곤 했던 개인적 취향들은 모바일 시대에 하나둘 부활하기 시작한다. 그래서 저마다 제각각인 취향들은 개성을 중시하고 남들과 똑같은 소비를 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결국 그 유니크한 자신만의 소비를 할 수 있는 극점에 팬슈머들이 등장하는 것이다. 팬슈머들은 그래서 소비하는 게 아니라 소비를 창출해낸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다른 이들도 좋아할 수 있게 사비까지 들여가며 홍보하기도 하는 이유다.
자, 그렇다면 이 팬슈머의 등장이 기업에 시사하는 건 뭘까. 결국 팬슈머는 같은 소비자다. 이들은 콘텐츠를 덕질하는 존재지만 또한 일상적인 소비를 하는 이들이기도 하다. 그러니 팬슈머로서의 소비 방식은 어디에서나 적용된다. 기업의 상품 구매도 이제는 ‘덕질’이 된다. 얼마나 마음을 잡아끌고, 취향을 저격하고, 나아가 소비자를 팬으로 만드는 참여와 동반성장을 경험하게 하는가가 성패를 가르지 않겠는가. 기업의 성패를 가르는 건 그래서 이제 팬덤의 유무가 되는 시대에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