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령화 선진국 된 나라들
‘영올드’에겐 공통점 있었다
해외에서는 인구 오너스 시대에 접어들었다는 발표 후 대대적인 부양책을 쏟아내고 있다. 일찌감치 인구 오너스 시대에 진입한 일본이 대표적인 예다. 일본을 포함해 독일, 호주 등 각국의 대책 수립을 사례를 통해 알아본다.
글. 신무경
Profile. 신무경
- 동아일보 경제부 기자
“열차 배차 간격을 줄이는 프로젝트가 2029년 마무리되니 최소한 그때까지는 일하지 않을까요.” 지난해 말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근교 위트레흐트에서 만난 건축 설계 엔지니어 얀 브륀덜 씨(73)는 ‘언제까지 일할 생각인가’라는 기자의 질문에 이같이 답했다. 한국에 있었다면 은퇴를 두 번은 더 했을 나이. 한두 해도 아니고 일할 날을 5년 더 내다본 점에 다소 놀라자 얀 씨가 말했다. “전 직장에서 나보다 한참 젊은 회사 사장이 ‘언제까지 일할 생각인가’라고 물어서 기분이 나빴어요. 못마땅해하는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관뒀지요.” 질문이 머쓱해지는 순간이었다. 현재 작업 중인 스키폴-니에미인 열차 프로젝트부터 암스테르담 정중앙을 가로지르는 52호선 전철, 운하 주차장, 라이든 일대 병원 건물 등 도시 곳곳에 그의 손이 안 미친 곳이 없다. “제게 일은 나만의 기술을 개발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자기 기술을 찾아서 최적의 장소에 쓰이게 하는 것이죠. 최고의 기량을 선보일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야 함은 두말할 것 없고요.” 지난해 동아일보 취재팀이 만난 네덜란드, 독일, 영국, 일본, 호주 등의 ‘영올드(Young Old·젊은 노인)’에게는 공통적인 특징이 있었다. 일 그 자체에 대한 욕심과 소명 의식이 있고 사회적 가치 창출에 적극적이라는 측면이다. 끊임없이 공부하는 모습도 눈에 띄었다. 자본과 건강을 갖춘 영올드를 대상으로 제반 편의시설과 커뮤니티를 기반으로 한 하우징 비즈니스도 빠르게 성장하고 있는 분위기다.
고령 사회엔 은퇴란 없다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만난 은행원 출신 벨리 아부다크 씨(68)는 두 해 전 정년을 맞았지만 금융회사에서 현역으로 재직 중이다. 튀르키예부터 한국까지 다양한 나라에서 온 회사들의 현지 적응을 위해 일종의 컨설팅을 해주고 있다. 여느 2030 직장인들처럼 출퇴근 시간에 러시아워를 뚫고 금융 중심가로 출근한다. 아부다크 씨는 “수입도 중요하지만 일을 하며 공부하게 되고, 삶의 의미를 얻게 됐다”라고 말했다. 일본 도쿄에서 만난 중학교 교사 출신 시노미야 마사요 씨(70)는 사회 담당 강사로 재취업해 경제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은퇴 전보다 월급(17만 엔)은 절반 정도로 줄었지만 만족도는 더 높다. “정규직 담임 교사로 일하는 것에 비하면 책임이 줄었고 학부모와 부딪칠 일도 적어 스트레스가 덜해요. 휴일도 많아졌고요. 여유가 생긴 덕분일까요. 웃는 얼굴로 학생들을 대할 수 있어서 행복하다고 느껴요.” 그에게 일의 의미란 무엇일까. “누구의 할머니, 아내보다 선생님으로 불리는 데 대한 자부심이 있어요. 그 때문에 체력적으로 힘에 부칠 때도 있지만 은퇴 후에도 일을 계속하려는 거예요.”
이 같은 분위기는 사회적 제도와 기업의 노력이 뒷받침된 덕분이기도 하다. 네덜란드와 영국은 정년 제도를 사실상 없앴다. 독일은 현재 정년 만 65세를 2029년까지 만 67세로 단계적으로 상향 조정하고 있다. 일본도 65세 고령자 의무 고용 조치(2012년) 실시로 정년이 사실상 65세로 운영되고 있다. 정부 차원의 생애 설계 서비스를 출시한 사례도 있다. 2020년 영국 노동연금부는 중장년층이 노후 준비를 스스로 점검하고 재취업 관련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온라인 플랫폼 미드 라이프 못(Mid-life MOT)을 내놨다. MOT은 차량 정기 점검을 의미하는 용어에서 비롯된 것으로 중장년층이 스스로 삶을 점검하고 개선이 필요한 부분을 파악하자는 취지가 담겨 있다. 독일 기업 보쉬는 기술력 유지를 위해 시니어 전문가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고령 근로자에게 교육, 멘토 역할을 맡기는 것이다. 영국 보험사 아비바도 고용 인력 3분의 1 이상을 50대로 구성하고 있다.
사회 담당 강사로 재취업한 시노미야 마사요 씨
영국 헨리온템스에 거주하는 캐런 그리브 씨
공부는 기본,
돈보다 사회적 가치 창출에 기여
“2016년부터 참여하기 시작했는데 만족도가 10점 만점에 10점입니다. 최근에는 영국 크로이던 지역 U3A(The University of The Third Age·은퇴자 학습공동체) 의장을 맡고 있기도 해서 하루가 너무 바빠요(웃음).” 지난해 말 만난 영국의 제니퍼 윌슨 씨(70)는 2016년부터 U3A 활동에 여념이 없었다. 퀴즈 나이트(술집에서 퀴즈를 풀며 시간을 보내는 일)부터 태극권 모임, 온라인 요가 클래스, 환경·기후 위기 그룹까지…. U3A는 회원 수 40만 명, 산하 소규모 그룹만 1,000곳이 넘는 대형 노인 커뮤니티다. U3A는 단순 친목 도모 이상의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 1,000여 개의 연구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사회적 가치를 창출하고 있는 것이다. 일례로 영국 옥스퍼드대 지원을 받아 제2차 세계대전의 일상 이야기와 물건을 담은 온라인 디지털 아카이브를 만들기도 했다. 세계대전을 경험한 당사자들의 일상을 다각도에서 생생하게 담아낸 것이다. 최근에는 우크라이나 난민들을 위한 영어 교육을 지원하고 있기도 하다. 글로벌 영올드들은 학업에도 진심이다. 취재진이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자유대 본관 지하 2층 강의실에서 마주한 수강생 40여 명은 60대부터 100세 임박한 이들까지 연령대가 다양했다. 이날 수업 주제는 천문학. 머리가 희거나 숱이 없는, 돋보기를 코 아래로 내려쓴 영올드들은 이른바 ‘별의 법칙’을 탐구하는 데 그 누구보다 진지했다. 이 강의는 레이던, 틸뷔르흐 등 네덜란드대학 5곳이 운영하는 노인을 위한 고등교육(HOVO) 프로그램 중 하나다. HOVO는 고령층이 사람을 만나고, 새로운 지식을 찾고, 자기계발할 수 있도록 독려하는 공간을 제공하는 데 그 취지가 있다. 암스테르담자유대에서만 7,000명의 시니어가 이 같은 수업을 듣고 있다. 네덜란드 전체로 넓히면 2만 5,000명에 달한다. HOVO 관계자는 “노령층이 주도적으로 살아갈 기회를 만들어 준다는 점에서 사회적 이바지를 하고 있다”라고 설명했다.
시니어 리빙 시장 확대
영올드의 건강한 삶은 커뮤니티에서 비롯되기도 한다. 사회생활에 활발하던 중장년층 시절에 비해 은퇴 후 만나는 사람의 수가 단절돼 고립감을 느껴 삶의 의미를 잃는 경우가 많은데 만남과 소통을 통해서 자아와 새로운 꿈을 발견해 내는 것이다. 대표적인 사례가 UBRC(University Based Retirement Community·대학 기반 은퇴자 공동체)다. 대학 캠퍼스 내에서 강의부터 피트니스센터까지 이용하면서 젊은 세대와 소통하고 평생교육 기회를 누릴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은퇴자 주거 단지의 시초인 미국에서는 현재 100개 이상의 UBRC가 조성돼 있다. UBRC가 대학뿐 아니라 호기심 넘치고 사회활동에 적극적인 영올드에게 유익한 환경을 제공하는바 2032년에는 400여 개까지 확대될 것이라는 전망이다. 고령 친화적 주거 공간과 돌봄 서비스 등을 결합한 시니어 리빙 시장 성장세도 가파르다. 지난해 취재진이 방문한 호주 뉴사우스웨일스주 서덜랜드 은퇴자 거주 마을(BUPA)에서는 수중 에어로빅, 공예 수업, 카드게임 등 입주자들이 자유롭게 참여할 수 있는 다양한 이벤트가 쉴 새 없이 열렸다. 린 씨는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과 교류하고 관계를 맺는 데 만족한다”라고 말했다. 지난해 말 영국 헨리온템스의 개인 회원제 클럽 필리스 코트에서 만난 캐런 그리브 씨(70)도 “우리 지역 노인들은 운동이나 취미, 동호회 활동에 열심이다. 삶을 즐길 수 있는 돈이 있기 때문”이라며 만족감을 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