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방국에 공급망 분산
‘프렌드쇼어링’ 전략 국내
中企도 참고할 만
팬데믹과 지정학적 갈등을 거치며 글로벌 공급망 지형이 급변하고 있다. 세계 각국은 핵심 제조업과 기술의 주도권을 되찾기 위해 앞다퉈 ‘리쇼어링(Reshoring)’과 ‘프렌드쇼어링(Friend-shoring)’ 전략을 추진하고 있다. 미국을 비롯한 선진국들은 자국 내 생산을 회생시키고 우방국 중심으로 공급망을 재편하며 이에 대응해 기업들은 생산기지 이동에 속도를 내고 있다.
글. 류주한
Profile. 류주한
- 한양대학교 국제대학원 글로벌전략정보학과장
탈중국·동맹 강화…
재편되는 세계 공급망 지도
세계 각국 정부는 공급망 리스크 대응과 일자리 창출을 내세워 공격적인 리쇼어링 정책을 내놓고 있다. 미국은 대규모 세액공제와 보조금을 앞세워 제조업 귀환을 장려해 왔다. 바이든 행정부는 ‘바이 아메리칸(Buy American)’ 정책을 통해 국내 투자 시 투자액의 최대 25%에 해당하는 파격적 세액공제를 제공하는 반도체법(CHIPS Act)을 발의했다. 트럼프 2기 정부는 자국 제조업 복원을 위한 고율관세, 규제 완화를 결합한 ‘초강력 리쇼어링 드라이브’를 추진하며 중국 의존도 축소를 핵심 정책으로 내세우고 있다. EU 역시 전략산업의 역내 복귀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독일은 ‘국가산업전략 2030’을 발표해 GDP에 제조업 비중 25% 달성을 목표로 스마트팩토리 등 혁신 기술 투자를 지원하고 있다.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 각국도 핵심 기술의 자국 내 생산 유치를 위한 공동 펀드 조성 및 규제 완화에 나서고 있다. 일본 정부는 공급망 안전보장을 위해 특정국 의존도가 높은 품목의 생산 거점을 타 지역으로 분산시키고 있다. 특히 중국에 의존하던 부품 생산 라인을 일본 국내로 복귀시키거나 아세안 등 제3국으로 이전을 독려하며 해당 중소기업에는 비용의 3분의 2, 대기업에는 2분의 1을 보조하는 정부 지원책을 펴고 있다. 반면 중국은 탈(脫)중국 움직임에 제동을 걸고 동시에 자국 내 생산 자립도를 높이기 위해 외국인 투자 규제 완화 및 자체 공급망 강화 정책을 내세워 대응하고 있다.
이러한 국가 간 정책 경쟁 속에 탄생한 개념이 바로 ‘프렌드쇼어링’이다. 재닛 옐런(Janet Yellen) 전 미국 재무장관은 프렌드쇼어링을 ‘신뢰할 수 있는 다수의 국가에 공급망을 구축함으로써 자유롭고 안전한 무역을 달성하는 전략’으로 정의한 바 있다. 실제로 미국은 2024년 행정명령을 통해 공급망 회복력 강화를 위한 백악관 공급망 회의를 공식화했고 동맹국들과의 긴밀한 협력을 공급망 전략의 축으로 삼고 있다. 트럼프 2기 정부는 중국 경제 노선을 더욱 노골화해 ‘자국 우선’ 공급망 전략을 심화시키고 있다.
공급망 재편, 현장에서 벌어지는 변화들
미국의 제너럴모터스(GM)는 2022년부터 미시간주에 약 66억 달러(약 8조 원)를 투입해 전기차 생산 시설 증설과 신규 배터리 공장 건설을 추진하고 있다. 이 투자로 건설된 GM–LG의 합작 배터리 공장(얼티움 셀즈)은 2025년 10월 오하이오주와 테네시주 등 2곳에 가동 중이고 미시간주에 1개가 추가로 가동될 예정이다. 인텔(Intel) 역시 애리조나주에 200억 달러 규모의 최첨단 반도체 공장 2개 착공을 시작으로 미국 내 생산 거점을 6곳으로 늘릴 계획이다. 반도체법에 따른 세액공제로 최대 80억 달러의 혜택이 가능하며 2026년 하반기에 첫 생산이 가능해 보인다. 유럽 기업들도 생산기지 본국 복귀(유턴) 사례를 만들고 있다. 독일의 지멘스(Siemens)는 2018년 풍력터빈 회전자 및 발전기 하우징 공장을 덴마크에서 독일 북부 쿡스하펜으로 이전한 바 있다. 이로 인해 약 1,000개의 지역 일자리 창출과 자동화 생산이 가능해졌다. 프랑스의 차(茶) 제조업체 쿠스미티(Kusmi Tea)는 자동화 생산 라인을 확충해 중국과 모로코에 있던 생산 시설을 프랑스 노르망디로 복귀시켰으며 물류비 절감, 품질 향상 효과를 거두고 있다. 일본에서는 로봇 자동화에 의한 리쇼어링이 늘고 있다. 캐논(Canon)은 조립 라인 인력을 20~30명에서 4~5명으로 줄이는 전면 자동화 공정을 구현하며 중국 카메라 공장의 상당 부분을 일본 오이타현으로 옮겼다. 우리 기업들도 변화에 동참하고 있다. 반도체, 이차전지, 자동차 등 분야에서 프렌드쇼어링 전략을 통한 미국 등 우방 시장 투자가 늘고 있다. 삼성전자는 미국 텍사스주 테일러시에 약 4,958㎡(약 150만 평) 부지의 첨단 파운드리 반도체 공장을 2026년 가동을 목표로 건설 중이다. 완공 시 기존 오스틴 공장의 4배 규모로서 다수의 한국 소재·부품 협력업체도 함께 진출할 것으로 기대된다. 현대자동차그룹도 미국 조지아주에 전기차 전용 공장과 배터리셀 공장 등 63억 달러(약 8조2,000억 원)를 투자해 2025년 가동을 앞두고 있다. 현대차는 이미 2024년 4분기에 조지아 전기차 공장에서 초기 생산을 시작했고 인근에 건설 중인 LG에너지솔루션 합작 배터리 공장은 2026년 상반기 가동을 목표로 한다. 이러한 대기업들의 해외 투자 움직임은 부품·소재를 공급하는 중소 협력사들에도 새로운 글로벌 공급망 편입 계기가 될 것이다.
국내로의 생산 복귀 사례는 지난 10년간 150개에 불과하다. 같은 기간 해외로 나간 기업은 1만 개 이상으로 추정된다. 인건비 상승, 수도권 투자 제한 등 국내 경영환경의 어려움이 가중되고 있어 ‘돌아올 필요도, 돌아올 수도 없다’는 입장이다. 이는 우리 중소기업의 리쇼어링에 현실적인 장애 요인이 많음을 시사한다.
리쇼어링 전쟁 속,
중소기업의 생존 전략
글로벌 리쇼어링 경쟁 속에 중소기업 역시 생존과 성장을 모색해야 한다. 대기업의 생산 이전은 부품·소재를 공급하는 중소 협력사에 새로운 시장으로 이동을 요구하며 이는 기회로 작용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주력 고객사가 제조 공장을 미국으로 옮긴다면 중소 협력업체도 현지 생산법인 설립이나 파트너십 체결을 검토해야 할 것이다. 차이나 플러스 원 전략처럼 생산 및 조달처 다변화로 특정 지역 의존도를 낮추고 리스크를 분산해야 한다. 지정학적 긴장에 대비한 재고 비축 및 대체 공급선 확보 계획도 사전에 수립해야 한다.
주요국의 리쇼어링·프렌드쇼어링 흐름 속에서
기업들은 새로운 물류망과 시장 확보에 속도를 내고 있다.
다만 지나친 본국 회귀는 비용 증가와 시장 축소 위험을 수반하므로 프렌드쇼어링을 통한 균형 잡힌 글로벌화가 현실적인 대안이 될 수 있다. 완전한 본국 복귀가 어려운 공정은 정치·경제적으로 안정적인 우방국에 분산 배치함으로써 안정성과 비용 효율을 동시에 도모할 수 있다. 따라서 중소기업들은 정부와 대기업의 공급망 재편 움직임을 예의주시하면서 어느 지역에 어떤 기회가 열릴지에 대한 전략적 통찰을 가져야 한다. 정부의 지원제도를 적극 활용하는 것도 필요하다. 정부는 해외 진출 기업의 국내 U턴을 돕기 위해 관세 면제, 보조금 지급, 부지 알선 등 다양한 인센티브를 제공하고 있다. 해외에 생산 거점을 구축하려는 중소기업들에는 KOTRA 등이 현지 정보 제공, 법률 컨설팅, 파트너 매칭 등을 제공하고 있다. 프렌드쇼어링 관련, 미국·EU 등도 공급망 협력 강화를 위한 중소기업 지원 펀드와 교육 프로그램도 운영하고 있으므로 글로벌 가치사슬에 편입되고자 하는 기업들은 이러한 네트워크에 참여해 보는 것이 좋다. 무엇보다 생산성 향상과 기술 혁신 등 기업 자체의 경쟁력 강화가 중요하다. 스마트팩토리, 자동화 투자를 통해 인건비 상승 부담을 상쇄하고 ESG 경영과 공급망 투명성을 강화해 우방국 조달 기준을 충족하려는 노력도 견지해야 한다. 중소기업은 규모가 작은 만큼 민첩성과 유연성을 강점으로 활용할 수 있으므로 변화하는 환경에 발 빠르게 적응하는 애자일(Agile) 경영이 필요한 때다. 리쇼어링 전쟁으로 글로벌 공급망 재편의 새로운 질서가 형성되고 있다. 이는 중소기업에 위기이자 기회다. 한편으로는 전통적 저비용 글로벌 조달 모델이 흔들리면서 비용 상승과 시장 재편이라는 도전에 직면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새로운 시장 진입과 국내 산업기반 강화의 계기가 될 수도 있다.